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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베소서 1:3~6 "역사적 신앙관"

Sermon

by Vano 2023. 7. 3. 19:00

본문

https://www.sarang.org/tv/sermon.asp?sflag=chocung

[에베소서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blessed us in the heavenly realms with every spiritual blessing in Christ.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For he chose us in him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to be holy and blameless in his sight. In love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he predestined us to be adopted as his sons through Jesus Christ, in accordance with his pleasure and will-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to the praise of his glorious grace, which he has freely given us in the One he loves.


주후 2023.07.02 주일 / 박영선 목사님(남포교회 원로목사님)

§ 본문: 하나님의 계획, 목적, 의지를 증언, 선포함.

예수님 믿어 중생, 자녀됨, 천국을 허락 받는 것 + 그 목적이 하나님의 '의지'이다.

단지 보상과 우리의 할 일을 넘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 모든 종교는 신의 정체성이 설명되어야 신자들이 그 의도와 방법을 이해하고 쫓아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경우에서 종교는 지극정성으로 빌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이해된다.

  무속신앙 기독교
X O
신앙 O O
정리 신은 없고 갈급한 인간과 인생의 간절한 신앙만 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부활의 주인이고 심판자이심이 순서대로 시간과 과정을 가진다.

◇ 오늘날 기독교인의 문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확신이 있고 죽었을 때 천국 가는 것을 믿기에 그 처음과 끝이 확실한데도, 그 사이 중간 과정의 오늘 현실에서는 구원과 천국 확신의 능력 없이 힘들게 살고 있다.

믿지 않는 자들과 비교했을 때 아무런 혜택이 없는 현실을 면할 수 없다.

◇ 기독교인의 질문

1. 왜 예수를 믿고 나서도 현실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2. 왜 예수를 믿음으로 인한 능력과 권세를 세상에 베풀며 살지 못하는가.

3. 왜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권력과 폭력으로 증명하지 않으시는가.

4. 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한다 하시고서는 우리에게 특권을 주시지 않는 인생을 살게 하시는가.

해결: 기독교 신앙관에 있어 실존적 신앙관에 역사적 신앙관을 보태야 한다.

 

 † 실존적 신앙관 VS 역사적 신앙관 

실존적 신앙관 역사적 신앙관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의 나를 아는 것.
창세 전에 우리 구원을 결정하셔서 시간과 공간(경우)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심으로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
구원론적 신앙고백
· 예수를 모르다 알게되어 구원 받아 천국 소망을 갖게 됨
복음적, 선교적 신앙고백

·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역사 속에서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자발성을 갖게 하심.
·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인류 속에 들어오심으로 인류는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론을 벗어나 계신 분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8b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 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게 사셍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착하게 사는 것(도덕법, 윤리)만으로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 이유는 없다. 착하게 사는 것은 맹자와 공자만으로도 충분하다.

☆ 하나님은 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욥기에서 잘 드러난다. 의인인 욥이 고난을 받았을 때 욥의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고 욥은 억울해 한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보이시며 말씀하신다. 

"이 피조물들이 그 조건이 있고 원인이 있어 존재하는 결과물이냐. 아무 조건이 없는데 창조주인 내가 만들었다. 너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당당하다는 거지. 그렇다면 이 피조물들은 잘해서 생겨났느냐?"

☞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그 권능의 결과물이다.

"너희는 세상의 이 창조물들과 다른 나의 상속자, 내 후손이다. 내가 너희의 잘잘못에 따라 보상하는 정도에 불과하단 말이냐? 부모는 자식이 잘못하지 않는 것만을 바라느냐?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라지 않느냐? 

 

◇ 야곱의 예

이름 야곱 이스라엘
발 뒤꿈치를 잡은 자, 약탈자, 날강도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
속뜻 · 자신의 필요를 남에게서 빼앗아 와야 함
· 제 필요를 채워줄 자가 없음
· 남에게서 빼앗아 와야 하는 고아가 아니다.
· 하나님인 내가 너의 부모다.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 너희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위해 존재한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랑믿음은 상대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단어다. 우리는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 자라나야 한다.

한 쪽이 다른 쪽에 조작될 수 없다. 각각 자발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사랑과 믿음이 자랄 수 있다.

◇ 한국 기독교인의 문제

회개를 너무 많이 한다.

→ 회개: 잘못을 지울 뿐 더 나아가는 것이 없다. 윤리, 도덕, 양심은 더 훌륭한 길로 가는 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잘못한 것을 꾸짖을 뿐이다. 

  윤리, 도덕, 양심, 타종교 기독교
목적 착하게 사는 것 착하게 사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초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

자식을 둔 부모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자식이 자라지 않는 병이다. 자녀가 자라는 것의 결정적 증거는 사춘기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기적을 도입하시지 않는다. 순종하여 죽는 길을 걸으신다. 그 영광과 진리를 이해 받지 못하는 자리까지 가셨다.

끝까지 너희의 수고를 몰라도 된다. 너희는 너희 책임을 다하라. 

로마서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윤리, 도덕을 지키는 신앙의 수준에서는 악을 감동시키는 선으로 이해할 구절이지만, 성경의 말씀은 '악당이 악당 노릇을 하더라도 너는 너의 자리를 지켜라. 네가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이다. 

§ 하나님이 아직도 구원의 문을 열고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세상이 만든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용서할 수 있으며 기다릴 수 있고 보복하지 않는다.

어느 날 세상 사람이 궁금해 한다. 판단 기준, 방향, 길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세상과 다른 방식에 대해.

§ 히브리서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신이신데 왜 순종함을 배워야 하며 온전하게 되셔야 했는가?

죄로 말미암은 사망을 경험하셔야 했기 때문 사망으로 사망을 물리치시기 위함.

§ 예수님을 아무도 못 알아 봤듯이 세상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 알기 위해선 실력이 있어야 한다. 실력이 있기 위해선 훈련을 해야 한다.

수많은 좌절을 겪어야 철이 든다. 그것에서 더 나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게 하시며 구원의 백성들을 부르는 일에 사용하신다.

우리의 분노와 좌절과 절망이 우리를 한 단계 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 음... 다시 정리해도 복잡하다.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는 아주 수준이 높은데 중간 단계의 설명을 많이 건너 뛰시는 느낌이랄까. 특히 후반부에 가서는 모든 말씀 사이의 간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ㅠ 더 붙들고 공부하고 싶기는 한데 내가 요즘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안 되어서... 안 될 것 같다.

* 욥을 향한 하나님 대답의 해석에서는 뇌에서 빛이 번쩍!했다. 피조물이 잘한 것이 있어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심과 권능의 결과물이라는 말씀.

* 또한 사랑과 믿음의 대상에 걸맞는 자격에 대하여, 한 쪽의 조작이 아닌 각각의 자발성에 대한 말씀에서도 번쩍! 온전한 사랑과 믿음, 즉 서로 사랑과 믿음의 관계란 양쪽 모두의 자발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로구나. 하나님은 그토록 진정한 관계를 원하셨던 거구나. 창조주께서 당신의 피조물에게 동등한 관계를 부여하시고 또 요구하시다니. 이 엄청난 겸손과 은혜를 무엇으로 비할까. 우리 하나님은... 멋지셔도 너무 멋지심.ㅠ 어쩌면 이토록 자비하실 수 있는 것이지? 내가 내 피조물에게 '너는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나와 소통하고 관계를 맺으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뭔가를 만든다면 순전히 나의 만족만을 위하여 만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너는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도록 해, 그것을 위해 내가 너는 만들었으니ㅡ그러지 않을까...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일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 피조물 인간에게 그토록 엄청난 겸손을 취하시어 우리를 동등하고도 진정한 관계로 초대하셨기에, 우리 또한 자녀이든 타인이든 다른 사람을 향해 그런 자세를 취하기를 원하시겠구나... 갈 길이 멀다. 멀어도 한참 먼데 나로서는.ㅠ 그래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 뜻을 이루실 것이니 용기를 내자! 60이면... 철이 좀 들 수 있겠는가 나는...ㅠ 너무 부족해서는.ㅠ

* 또 느끼는 거지만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는 오정현 목사님의 설교와 아주 다르다. 박 목사님 설교는 건조하고 뾰족하고 거침없고 높고 정확하다. 뭔가 신학 박사님들이라면 잘 이해하실 것 같은 그런. 일반 성도로서... 는 나만 해당하는 걸 수도 있지만... 암튼 나로서는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쉬이 이해하기는 힘들고, 이렇게 다시 글로 정리해도 쉽지는 않다. 이런 까다로움으로 인해 집중이 흐트러지는 것을 확 잡는 것이 박 목사님 특유의 유머와 위트다. 박 목사님 설교가 귀함은 다른 모든 교회 주일예배 설교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의 거의 모든 설교가 비슷하지 않나? 회개하라. 절망하지 말라. 어려운 현실 속에 주를 의지하라. 기도하라. 말씀을 더 가까이 하라. 주께 기도하면 힘든 현실을 이길 수 있다. 거의 모든 설교가 비슷함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박 목사님의 설교는 그것을 넘어선다. NT이심을 확신하겠을 정도로 진리를 탐구하시는 데 있어 거침이 없으시다. 상처 받으면 어쩔 수 없다. 흔들린다면 그 또한 주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다만 주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 거친 음식을 씹어 먹어야 한다. 삶에 대한 말랑한 위로의 카스테라를 원한다면 다른 도움을 받도록 하라. 거칠고 질기며 떫은 음식이지만 잘만 씹어 소화한다면 영혼의 비약적인 성장에 이르게 하는 음식을 주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ㅡ인 것만 같은. 아 그래도 어려워. 신나기는 하는데 어렵다.

오정현 목사님의 설교는 풍성하다. 일반 교회 설교와는 확실히 다르지. 누구나 믿음의 분량 만큼 먹고 즐길 수 있다. 그리고 풍성하게 자랄 수도 있다. 성경의 많은 구절을 여유롭고 풍성하게 오가며, 믿음이 어린 사람부터 튼튼한 사람까지 골고루 받아 먹을 수 있도록 그 메세지에는 성경구절과 예화와 예술과 문학, 철학, 과학에 가끔은 유머까지 곁들여 최대한 많고 다양한 사람이 누리게 한다. 그래서 오정현 목사님 설교를 정리하면 아주 화려하고 깊고 근사하다는 생각에 감탄하게 돼. 우리 성도들이 담임 목사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풍성하고 자상한 설교가 기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오정현 목사님의 설교에는 채찍과 당근도 있고 무엇보다 아프고 소외된 사람을 향한 따뜻한 위로가 있다. 촉촉하고 따스하고 풍성한 설교.

이 뛰어난 두 분의 설교 앞에 어느 설교가 더 나은가를 묻는 것은 천박하다. 두 분 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멋진 주의 종이시다. 주께서 택하신 사람을 어떻게 만드시고 역사하셔서 세우시는가를 보는 일이 이처럼 신나고 근사한 일이라니. 반짝이는 두 분 목사님의 설교를 먹고 누릴 수 있어 행복한 나는 감사하게도 사랑의교회 성도입니다.💖

 

→ ◇ ☞ † ⇒ ☆ § ① ② ③ 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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