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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무엘상 22:1~5 "다윗의 길, 내려갈 때 보이는 것들"

Sermon

by Vano 2023. 7. 2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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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arang.org/tv/sermon.asp?sflag=toyo&db_idx=22414

[사무엘상 22:1~5]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David left Gath and escaped to the cave of Adullam. When his brothers and his father's household heard about it, they went down to him there.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All those who were in distress or in debt or discontented gathered around him, and he became their leader. About four hundred men were with him.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From there David went to Mizpah in Moab and said to the king of Moab, 'Would you let my father and mother come and stay with you until I learn what God will do for me?'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So he left them with the king of Moab, and they stayed with him as long as David was in the stronghold.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But the prophet Gad said to David, 'Do not stay in the stronghold. Go into the land of Judah.' So David left and went to the forest of Hereth.


주후 2023.07.29 토비새 / 홍성환 목사님(이천신하교회)

* 고은 시인,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올라갈 때(인생의 좋은 시기)보다 내려갈 때(인생의 힘든 시기) 보는 것이 더 소중하고 귀한 경우가 많다.

*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걸었던 길은 심한 내리막길이었다. 골리앗 사건 직후 아주 잠깐의 오르막길 후 사울을 피해 10년 동안 도망 다녀야 했다: 라마 나욧이 사무엘에게로 친구 요나단에게로 아히멜렉 제사장에게로 적국인 블레셋으로

그러나 그는 피난처를 찾지 못했다. 그런 그가 결국 선택한 곳은 물 없고 풀 없는 척박한 유대 광야였다.

바로 이 광야에서 다윗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으로 빚어졌다.

 모세 역시 왕자로 살다가 광야에서 천한 목자로 살면서 위대한 모세로 빚어졌다.

광야가 아니면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

내가 내려가고 있다면, 오늘 내가 걷고 있는 곳이 광야라면, 반드시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이 내리막길은 바닥이 아니라 다시 튀어 오르기 위한 점프대이다.

 이 광야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중략)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시편 142편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친 다윗이 시

광야에서 다윗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대면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는 다윗과 모세의 광야가 필요하다.

* 목회하시면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 교회는 오래 다니는데 아무 변화가 없는 사람.

* 정말 신앙인이 되어 말씀 앞에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자신 안에 깊이 숨어 있는 정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인정해야 한다 비로소 겸손해지고 남을 비난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 다윗은 유다 광야 아둘람굴에서 400여명을 만나게 된다: 정치적 망명자, 도망자, 상처 받고 원통한 자들 등 사회부적응자들과 인생 패배자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면서 함께 아파하면서 살아가던 아둘람굴에서 다윗은 그들(백성)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지도자가 되었다. 훗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아둘람굴에서 만난 사람들이 초기 내각을 구성했다.

그때까지 다윗은 자신의 안위 만을 살았기에 사울의 진노가 피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둘람굴에서 다윗은 새로운 사명감을 갖게 되어 하나님 앞에 새로운 꿈과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때 지은 시:

시편 57편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백성에게 칭송 받던 시기 다윗은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러나 소망과 기회 없을 것 같은 가장 낮은 광야, 적막한 죽음의 땅에서 그는 하나님 주신 사명감을 발견하여 사울을 향한 적개심에 휘둘리지 않기로 결단한다.

요셉 또한 마찬가지로 민족을 이끌겠다는 사명감으로 인해 형들을 향한 복수심을 이겨냈다.

 하나님의 섭리이자 구원 계획

하나님의 사명을 발견한 사람은 내 안의 크고 작은 상처에 휘둘리거나 제한 받지 않는다. - 홍성환 목사님

* 실패의 자리, 낮은 자리, 광야에서 사명을 발견하고 붙들고 죽도록 이루기 위해 살아가자.

◇ 낮은 문, 길로 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 홍성환 목사님

* 사막, 광야에서 다윗이 불렀던 시, 노래가 아주 많다.

광야는 하나님으로 가득하고 광야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 - 유진 피터슨

* 지금 내가 걷는 길이 광야라면 바로 내 곁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라.

* 가끔은 하나님께서 강제로 광야로 내모실 때가 있다 하나님의 강제적 은혜

*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서있을 때가 있다. 이 광야에서 붙들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광야에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성도들의 고통은 깨달으면 끝난다. - 홍성환 목사님의 아버님 목사님

하나님께서 나를 왜 광야 학교에 입소시켰는지 하나님의 의미와 고난의 이유를 알고 하나님과 내 자신을 만나게 되면 그 고난은 끝이 난다. 광야길이 끝나지 않는다면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야, 좁은 길을 만나면 무조건 머리를 숙이고 겸손해져야 한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게 되면 광야는 끝난다.
내려가는 길목에서 보이는 것들을 소중히 하고 그것을 통해 사명을 발견하고 붙들고 이루는 삶을 죽을 듯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다윗처럼 회복을 넘어 부흥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 홍성환 목사님



* 참... 

* 중간 이후 내내 울었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울었다.

* 광야. 겸손. 사명. 이 세 단어는 작년 이후 지금까지 내가 줄곧 부르짖고 있는 단어들이다. 어쩌면 그 핵심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설교. 요즘 내겐 말씀이 쏟아지고 있어서 모든 설교가 다 나를 향한 주님의 확신의 말씀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정확히는 지난 7월초 금식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러하다. 십일조 금식 1년, 할부 금식 6개월이 지난 시점. 그 때 이후 내내 거의 모든 예배가 주께서 내게 주신 기도와 깨달음, 훈련, 배움에 대한 확신의 말씀으로 가득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설교까지. 

엄마를 보내드린 후 1년 반이 넘도록 나는 광야를 걷고 있다. 그 전에도 내 삶은 황폐했다. 그러나 그 광야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아니,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때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셨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찾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계셨지만 계시지 않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찾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내 생애 최대의 광야를 걷고 있다. 광야도 광야도 이런 광야가 없었다. 내 인생에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광야. 그리고 이 삶의 광야에서 나는 더더욱 깊은 은혜의 광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스스로'라 생각하지만 과연 스스로였나 싶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이 은혜의 광야. 십일조 광야. 12개월 할부 광야. 매달 초 두려움과 기대가 묘하게 뒤섞인 심정으로 찾는 은혜의 광야에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은빛 황금빛 은혜가 하늘 만나 되어 쏟아져 내린다. 광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다.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없는 광야는 세상의 전부이시고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시며 하나님은 절대로 사랑이시므로. 당신을 찾으러 광야 속 광야, 지성소 광야로 들어가 주를 간절히 부르는 자를 반드시 만나 주신다. 그것도 급속히 만나 주신다. 당신의 그 크신 존재를 광야에서 몸을 웅크린 먼지보다 작은 나를 향해 잔뜩 구부리시며, 내 입에서 나오는 기도 한 마디마다 고개 끄덕이며 응답하신다. 눈물 한 방울마다 주의 거룩하신 손바닥 위에 올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가슴에 담으신다. 광야이기에 주님으로 가득하여 주님의 임재가 가득한 시내 산. 주님과 나만이 존재하는 은혜의 광야에서 주님은 나를 만나 주시고 내 눈물 닦아 주시고 나는 주님 향해 노래 부른다. 감사와 찬양과 감격을 내 존재 다해 노래한다.

한참 신나게 기도로 달리던 4월. 십일조 금식 1년 직전. 승승장구 기도를 달리던 나는 넘어졌다. 나의 모든 기도에 신속히 응답하시던 하나님 앞에 크게 넘어졌다. 돌부리는 내 안의 교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내 교만의 실체를 보여 주셨고, 나는 그 흉측하고 끔찍한 몰골에 소름이 끼쳤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겸손하라'. 

너무나 크게 놀란 이후 나는 두려워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죄를 짓는 중에도 능력을 받을 수 있다.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중에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 그 공포.

주께서 다가와 말씀하셨다. '젖을 떼자. 이유식 먹을 때가 되었다.'

그 때 이후 매일같이 간절히 구하는 것이 주의 은혜의 망치와 회개의 영이다. 제발 은혜의 망치를 내리사 나의 교만과 자아, 자존심, 공로 의식, 자기애를 철저히 부수어 가루내시고 성령의 불로 태워 소멸시키소서. 내게는 필요 없습니다.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사 회개의 영을 부어 주소서.

사가 2학기 때 새로이 구하기 시작한 것이 사명이다. 교회의 사명은 안다. 제자훈련과 교회들을 섬기는 교회. 그리고 이제 나는 내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구하고 있다 석 달 동안. 매일같이 구하고 있다.

광야. 겸손. 사명.

현재 나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세 개의 키워드.

최근 내 기도 제목들이 그 확장을 더해가면서 이전에 없던 의심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맞나? 어째서 이렇게 엄청난 기도제목들을 계속 올리는 것이지? 어째서 기도가 자꾸 크기와 속도를 키우는 것이지? 이런 기도들을 이 작고 보잘 것 없고 능력 없고 가진 것 없는 나 하나가 하는 것 맞아? 왜 나는 이런 기도를 하는 거야? 이것이 맞나? 내가 뭔가 착각하는 건 아닐까? 하나님 뜻이라고 착각하는 걸까?

흔들림 없던 내 믿음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6.3을 지나면서였던 것 같다. 나는 6.3을 위해 해야 할 일 맨 마지막 한 가지를 하지 못했고, 마음 속 주님 음성에 순종하지 못했고, 그 결과 6.3을 충만히 누리지 못했다. 실컷 기도로 달려 놓고는 혼자 시험에 걸려 넘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둥대었고, 나는 서서히 기도에 자신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 즈음 선명히 느껴지던 음성. "내가 광야를 기다리노라." 그리고는 얼마 전 시작된 이유식 훈련과 함께 쏟아지는 말씀과 말씀, 또 말씀들, 기도마다 수없이 바뀌는 기도제목들, 눈물, 바뀌는 방언들, 새로운 형태로 터지는 방언 찬양, 또 새로이 들리는 찬양 목소리들... 나는 매일같이 공격을 받는다. 오늘도 잠시 10분 눈을 붙이는 동안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배만 드리면 은혜가 쏟아진다. 말씀이 쏟아진다. 이전의 말씀들이 새로운 언약의 말씀들이었다면, 요즘 쏟아 주시는 말씀들은 주신 말씀과 하게 하신 기도 제목들, 그리고 내 훈련에 대한 확신의 말씀들이다.

오늘 들은 설교 내용을 hs에게 말했더니 아주 놀란다. 몹시 놀란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의심했거든'이라는 내 말에 또 놀란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 또한 많이 걱정스러웠다고 고백한다. 내가 너무 이상하게 나가는 것이 아닐까, 혼자 지나치게 착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한다. 누구라도 내게 일어난 일들, 내가 하는 기도들을 들으면 이상하다 생각할 거라고. 그런데 최근 설교 때마다 내게 주시는 말씀들을 나누었고, 그때마다 신기해 했다. 나의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다 아는 hs이니. 그런데 오늘 설교는 hs에게도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 이 정도면 도저히 반박불가란다. 이 설교를 듣기 전 지금까지 모든 단계마다 내 상황을 hs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이야기해왔기 때문에, '광야, 겸손, 사명'은 나만큼이나 hs에게도 익숙한 단어들이다. 바로 그 단어들로 이루어진 이 설교를 말하니 놀란 거였다. "나도 의심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확신의 말씀을 주시는가 보다."

*

말씀은 계속 부어 주신다. 몇 개월인지도 모른다. 풀어 주리라. 자유케 하리라. 너를 쓰리라. 그리고 오늘 말씀하셨다. 광야가 끝나리라.

그 말씀 들으며 울었다. 눈물이 멎지 않고 계속 방울방울 샘솟았다.

"아빠... 전 이 광야가 좋아요..."

하나님의 뭉클한 마음.

이 현실의 광야가 버겁다. 너무 버거워 숨이 막힐 정도다. 그런데 동시에 평안하다. 하나님으로 온통 충만한 이 광야가 내게 귀해도 너무 귀하다. 어쩌면 나는 이 광야를 변화산이라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내 두 눈 가득 하나님 한 분으로 꽉 찬 이 광야가 내게 너무 소중해서. 너무나 소중해서. 내가 이 광야를 벗어나 하나님을 덜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내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면 어떡하지. 그것이 너무 싫고 싫고 또 싫다. 나의 연약함이 내 하나님을 지금처럼 절실하게 찾지 않게 될까 봐. 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물자와 사람들이 주어지면 내가 그만큼 하나님을 덜 찾게 될까 봐. 그냥 내게 주신 것으로 나 혼자 결정해 버릴까 봐. 큰 일에만 하나님을 찾게 될까 봐. 마치 자판기처럼. 나의 이 소중한 하나님을 내가 자판기처럼 여기게 될까 봐 걱정하는 나의 연약함이 서럽고 또 미워서 울었다.

*

광야는 사랑의 처소다. 모든 가식과 헛된 꿈을 벗은 내가 내 유일한 신랑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과 농밀한 사랑을 나누는 내밀한 공간이다. 하나님을 깊이 만남으로 나 자신을 더더욱 정확히 보게 되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됨으로 하나님과 하나되는, 오롯이 둘만의 은혜로운 신혼 침대. 

*

요즘은 밥 먹을 때 식기도가 간단해진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주님 저를 구성하시고 채우시며 살아 주세요.

이 음식 먹고 주님 더 사랑하게 해주세요."

*

할렐루야. 은혜로운 홍성환 목사님을 보내 주셔서 언약과 그 확신의 말씀으로 저를 붙들어 주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모든 영광 주님 홀로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 † ⇒ ☆ § ① ② ③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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