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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When I came to you, brothers, I did not come with eloquence or superior wisdom as I proclaimed to you the testimony about God.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For I resolved to know nothing while I was with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I came to you in weakness and fear, and with much trembling.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My message and my preaching were not with wise and persuasive words, but with a demonstration of the Spirit's power,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so that your faith might not rest on men's wisdom, but on God's power.
이충희(Ryan Lee) 목사님(Blessed International 교회) · 주후 2023.08.12
* 고린도교회: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충만했던 교회
→ 그런데도 다툼과 분쟁, 분열이 많았다(누구에게 속했다...)
*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사로 인해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귀에게 속아 좋지 않은 일을 일으키거나 연루된다.(경쟁 시기 질투...)
* 당시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 순회하는 철학자들, 주로 소피스트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본질이 아니라 스타일이었다.(예: 누가 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가 등)
→ 이런 사회에 살다 보니 고린도 사회의 세상적인 사상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도 스며들기 시작했다.
→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지혜: 세상적인 지혜를 의미함.(하나님의 지혜가 X)
⇒ 본질이 아니라 스타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예) 파워풀한 바울이 좋다 vs 바울은 설교가 너무 길어 등.
☞ 교회가 본질을 잃고 외적, 물질적, 세속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 마귀가 들어와 교회에 혼란을 일으킨다.
☆ 사도 바울: 유창한 설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인간은 지혜는 죄와 죄의 결과를 정복할 수 없다. 오직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지혜로만이 정복할 수 있다.
☆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나온다.
→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
◇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떄 말씀사역과 성령사역을 나누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씀사역 = 성령사역이다. 말씀은 성령님이 쓰신 것이고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성령님이 임하시기 때문.
◇ 성령님이 임하셔서 하시는 일: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의 핵심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성령님은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모든 초점을 맞추신다.
요 16:13-14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 성령님 알고 성령충만 받게 되면 내 삶에서 예수님과 십자가가 나타난다.
☞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과 능력을 주신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단지 구원의 은혜 뿐인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신다. 그 은혜는 말씀에 순종할수록 더 많이 체험할 수 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십자가를 사랑하고 짊어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나타난다.
◇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 내 육신을 죽이고 = 예수님과 함께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과 함께 매일을 살아갈 때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난다.
예 1) 동성애 선언한 아들로 인해 교회를 떠났던 아버지가 불치암에 걸렸는데 회개하고 기도하고 예수님께 돌아오자 암이 나았다.
☞ 목사님이 하신 일: 성도를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게 하고 병 낫기를 위해 기도했다.
† 우리가 십자가를 보고 십자가의 삶을 살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난다!
☞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 예수님 시체를 보러 간 막달라 마리아가 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곁에 계셨는데도 알아 보지 못했다.
요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 오늘날 너무 많은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데도 그것을 모른다.
→ 교회 와서 걱정 근심 다 풀어 놓고는 다시 싸서 가져간다.
→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하지 못해서 믿지 못한다.
◇ 나는 내 흰머리 갯수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다 아신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어려운 시험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이 시험을 네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음을 내가 안다' 말씀하신다.
→ "너는 모르겠지만 네 믿음으로 이 시험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음을 나(하나님)는 안다."
→ 그런데도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해 낙담한다.
☞ 십자가로 돌아와 십자가의 삶을 살면 약 먹지 않고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 복음의 단순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십자가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
* 말씀 사모하여 많이 읽고 순종하던 소녀가 유방암 재발한 엄마를 위해 기도한 일.
◇ 고아로 자란 푸에르토리코 여성의 고민: 평생 가정 이루는 것이 소원인데 유산을 8-9번 하고 40대로 들어선 상황.
☞ 축복기도 하려는데 마음 속에 성령님께서 '선포하라, 금년 말까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라 두 번 말씀하심.
→ 선포하심. 그리고 "용서할 사람은 다 용서해야 한다. 다 용서하고 기도하자."
→ 아이 둘을 낳게 되었다.
◇ 말씀 순종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 오정현 목사님께서 이충희 목사님은 '인격적 성령사역의 예'라고 하셨는데, '인격적 성령사역'이 뭘까... 검색해도 나오지 않네. 이것을 분리하면 인격적 + 성령사역일 텐데. 뭐지? '성령사역'은 알겠고. '인격적'이 문제인데. 그러니까 그 '인격'의 주체가 누구인 걸까.
① 성령님: 성령님은 인격적이시니 그 인격적인 성령님께서 사역하신다.
② 이충희 목사님: 목사님께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시기에 성령님의 능력이 치유로 나타나는 것이니 목사님의 인격이 성령님을 닮았다.
③ 치유 대상이 되는 성도: 회개와 십자가로 돌아오면 성도의 인격에 변화가 생기니 그 성도의 주 안에 변화된 인격에 따라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
내 생각엔 ① 번일 것 같긴 한데 ②번일 수도 있을 것 같고. 근데 ① 번은 곧 ③ 번으로 연결되긴 한다. 즉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성도의 인격에 반응하여 역사하시기 때문. 성도의 인격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 좋은 인격이 되면 그만큼 많이 역사하시고, 성도가 성령님 역사하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상태이면 역사하지 않으시니까. 합당한 상태란 곧 말씀 사모와 순종. 말씀대로 사는 삶일 것이다.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 = 말씀에 쓰인대로 사는 것
큰일났네... 나 수양회 때 거짓말했는데.ㅠ 방 사람들에게 금식 고등학생 때 이후 처음이라고 거짓말했다. 또 토요일까지인 거 말 안 했다. 금요일까지인 척 했어. 그러면서 제공되는 음식들 속이 안 좋다니 안 좋아한다니 거짓말 해대며 혼자 안 먹었.ㅠ 아아 그래놓고 네버 블로그에는 왜 썼는가 그래.ㅠ 확실하다. 나 이거 회개해야 해. 아까 낮에 방 사람들이 내 블로그 발견했. 다들 난리났는데. 작가라니. 블로그에 일기 좀 썼기로서니.ㅠ 다들 칭찬해주었지만 내가 거짓말한 거 다 들통났다.
나는 왜 거짓말을 했는가.
스트레스가 되어서. 8월 초 제천 갔을 때 소 목사님을 뵈었는데, 거기서 칼 세미나 집을 공개해 주었던 최 권사님 순원분을 만났다. 난 그분께 금식 이야기 한 적 없는데, 그 분이 반가워하면서 내가 금식한다는 이야기 들었다고 말해서 민망했다. 난... 금식이 일주일로 고정되면서 어떻게 해도 화요일 아침 식사를 피해갈 수 없겠어서... 권사님들 자꾸 의심하시기도 하고 자꾸 부르셔서 밥 먹이려고 하시기도 하고... 그래서 말씀드린 거였는데, 순원분께 말씀하시리라곤 미처 생각 못했거든. 어디까지 말씀하신 걸까. 이번 수양회만 말씀하신 것이면 좋겠는데 부디.
사가에서도 그렇고 자꾸... 십일조 금식을 눈치채는 분들이 늘어가는 것 같아서. 표 안 내려고 애는 쓰는데, 금식이 진행되면 될수록 사가에서는 '오늘 유달리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고 하실 정도라서. 그런데도 장로님이나 집사님들 형제분들인데도 희한하게 눈치가 빠르셔서는. 자꾸 '혹시 금식 중이야?'라고 자꾸 물어 보시니까.ㅠ 그래서 스트레스가 좀 된다.
처음엔 수양회 방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어서, 다들 금식 처음이라고들 무서워하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금식해봤다, 실은 오늘이 사흘째다, 등등 떠벌리게 되면 회칠한 바리새인이 될까 봐... 는 물론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고 싶으신 복을 내가 여기서 떠벌려서 내 공으로 미리 다 받아 써버릴까 봐. 하나님은 나와 둘이 비밀스레 꽁냥꽁냥하는 것도 몹시 좋아하시니까. 나도 좋고. 암튼 그래서... 한 번 말하면 다들 또 말이 많을 것 같고 나는 계속 말해야 할 거고 그러다 보면 십일조 금식까지 말하게 되어 버릴까 봐 거짓말을 했더니... 나 혼자 내내 늘 활기찬 것을 다들 신기해하면서 자꾸 물어보아서 사소하게 시작한 거짓말이 자꾸 커졌다. 속이 안 좋다니 죽을 안 좋아한다니 입맛에 안 맞다니 등등 하면서 말이다. 집에 와서 찔리긴 했는데... 금식하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더 싫어서 별 생각없이 넘겼다가 오늘 기어이 발각된 것. 네버 블로그에 쓰지 말았을 걸. 진작 수정했을 걸. 바보.ㅠㅠ 바보가 아니라... 집에 가서 회개기도 해야겠다.
*
이럴 때면 모르겠다.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기독교인에게 있어 '금식 기도'는 상당히 자극적인 기도의 종류인지라, 다들 그 단어 앞에서는 잠시 모든 것이 멈추는 느낌이거든. '금식 기도'라는 단어를 접하는 성도들의 눈에서는 수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것을 본다. 두려움, 부러움, 아쉬움, 죄책감, 의심, 그리고 질투. 이 모든 감정들을 한 번에 소환하는 '금식 기도'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굳이 그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고 싶지 않다. 그런 표정들을 보는 것이 피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에 대해 말하다 자칫 내가 교만의 극악죄를 범하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렵기도 하고.
주님은 서서 따로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기도한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두고 의롭지 않다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은밀히 하나님 앞에서만 드리는 기도를 참 기뻐하신다. 그런데 동시에 주님의 은혜는 나누어야 한다고 한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는 엄청나다. 그렇기에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세 가지 중 하나의 방법'이라 하신 오정현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나의 금식기도를 나누어 주님의 은혜까지 나누는 것이 맞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나의 고민이 한 두세 달 정도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만 은밀하게 뭔가 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기도 하고... 동시에 나는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교만도 큰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밝히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같은 방 식구들 지금쯤 서운하지 않을까. 다들 훈련이 잘 된 분들이라 좋은 말만 해주고 있긴 한데, 배신감 느꼈겠지는. 아...ㅠㅠ 지금 생각으로는 네버에 그거 쓰지 말았을 걸 싶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안다. 왜냐하면 이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어느 상황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금식 기도와 거짓말의 상관 관계. 이거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ㅠ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소 목사님께 여쭤 보면 대답해 주실까.
'말씀대로 살다'에서 여기까지 이야기가. 근데 고민인 거라. 나 고민이 돼.ㅠㅠ 아직 믿음도 약하고 섬김도 약하고 훈련도 안 되어 있는데, 주께서 주신 은사가 '기도'이다 보니 사람들이 자꾸 복잡하게 반응을 한다. 그것이 피곤해 난...
*
설교는 단순했는데 내용이... 어쩜 이런가 싶도록 엄청나다.
'성령사역'은 최근 오정현 목사님께서 집중하시는 주제인 것 같다. 나 또한 그렇고. 에이, 내가 딱히 '사역'이랄 건 없고. 그저 성령님의 전적 통치를 매일같이 사모하고 있으니 만큼 관심이 많이 쏠린다. 더군다나 '치유/신유'는...
모르겠다.
*
유산한 여성도님을 향한 성령님의 명령에 깜짝 놀랐다.;; 바로 얼마 전 내가 '6.3 아침과 같은 음성은 되도록 주시지 말아 주세요'라 했거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거라 생각했다. 뭐... 내게는 그저 '가서 축복기도를 하라'는 마음이었던 거지만. 정말로 주님의 뜻이 맞는 걸까? 요즘은 기도할 때 방해가 너무 심해서... 영적 분별력을 위해 더 기도해야겠다. 말씀을 열심히 보아야.
→ ◇ ☞ † ⇒ ☆ § ① ② ③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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