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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린도전서 2:1~5 "믿음의 기반"

Sermon

by Vano 2023. 8. 14. 19:44

본문

https://www.sarang.org/tv/sermon.asp?sflag=toyo

[고린도전서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When I came to you, brothers, I did not come with eloquence or superior wisdom as I proclaimed to you the testimony about God.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For I resolved to know nothing while I was with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I came to you in weakness and fear, and with much trembling.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My message and my preaching were not with wise and persuasive words, but with a demonstration of the Spirit's power,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so that your faith might not rest on men's wisdom, but on God's power.


이충희(Ryan Lee) 목사님(Blessed International 교회) · 주후 2023.08.12

* 고린도교회: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충만했던 교회

그런데도 다툼과 분쟁, 분열이 많았다(누구에게 속했다...)

*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사로 인해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귀에게 속아 좋지 않은 일을 일으키거나 연루된다.(경쟁 시기 질투...)

* 당시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 순회하는 철학자들, 주로 소피스트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본질이 아니라 스타일이었다.(예: 누가 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가 등)

이런 사회에 살다 보니 고린도 사회의 세상적인 사상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도 스며들기 시작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지혜: 세상적인 지혜를 의미함.(하나님의 지혜가 X)

 본질이 아니라 스타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예) 파워풀한 바울이 좋다 vs 바울은 설교가 너무 길어 등.

교회가 본질을 잃고 외적, 물질적, 세속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마귀가 들어와 교회에 혼란을 일으킨다.

 사도 바울: 유창한 설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인간은 지혜는 죄와 죄의 결과를 정복할 수 없다. 오직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지혜로만이 정복할 수 있다.

☆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나온다.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떄 말씀사역과 성령사역을 나누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씀사역 = 성령사역이다. 말씀은 성령님이 쓰신 것이고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성령님이 임하시기 때문.

성령님이 임하셔서 하시는 일: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의 핵심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은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모든 초점을 맞추신다.

요 16:13-14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님 알고 성령충만 받게 되면 내 삶에서 예수님과 십자가가 나타난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과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단지 구원의 은혜 뿐인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신다. 그 은혜는 말씀에 순종할수록 더 많이 체험할 수 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를 사랑하고 짊어지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나타난다.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 내 육신을 죽이고 = 예수님과 함께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과 함께 매일을 살아갈 때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난다.

예 1) 동성애 선언한 아들로 인해 교회를 떠났던 아버지가 불치암에 걸렸는데 회개하고 기도하고 예수님께 돌아오자 암이 나았다.

목사님이 하신 일: 성도를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게 하고 병 낫기를 위해 기도했다.

† 우리가 십자가를 보고 십자가의 삶을 살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난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수님 시체를 보러 간 막달라 마리아가 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곁에 계셨는데도 알아 보지 못했다.

요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오늘날 너무 많은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데도 그것을 모른다.

교회 와서 걱정 근심 다 풀어 놓고는 다시 싸서 가져간다.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하지 못해서 믿지 못한다.

나는 내 흰머리 갯수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다 아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어려운 시험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이 시험을 네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음을 내가 안다' 말씀하신다. 

"너는 모르겠지만 네 믿음으로 이 시험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음을 나(하나님)는 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해 낙담한다.

십자가로 돌아와 십자가의 삶을 살면 약 먹지 않고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 복음의 단순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십자가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

* 말씀 사모하여 많이 읽고 순종하던 소녀가 유방암 재발한 엄마를 위해 기도한 일.

  고아로 자란 푸에르토리코 여성의 고민: 평생 가정 이루는 것이 소원인데 유산을 8-9번 하고 40대로 들어선 상황.

☞ 축복기도 하려는데 마음 속에 성령님께서 '선포하라, 금년 말까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라 두 번 말씀하심.

→ 선포하심. 그리고 "용서할 사람은 다 용서해야 한다. 다 용서하고 기도하자."

→ 아이 둘을 낳게 되었다.

◇ 말씀 순종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 오정현 목사님께서 이충희 목사님은 '인격적 성령사역의 예'라고 하셨는데, '인격적 성령사역'이 뭘까... 검색해도 나오지 않네. 이것을 분리하면 인격적 + 성령사역일 텐데. 뭐지? '성령사역'은 알겠고. '인격적'이 문제인데. 그러니까 그 '인격'의 주체가 누구인 걸까.

① 성령님: 성령님은 인격적이시니 그 인격적인 성령님께서 사역하신다.

이충희 목사님: 목사님께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시기에 성령님의 능력이 치유로 나타나는 것이니 목사님의 인격이 성령님을 닮았다.

③ 치유 대상이 되는 성도: 회개와 십자가로 돌아오면 성도의 인격에 변화가 생기니 그 성도의 주 안에 변화된 인격에 따라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

내 생각엔 ① 번일 것 같긴 한데 ②번일 수도 있을 것 같고. 근데 번은 곧 ③ 번으로 연결되긴 한다. 즉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성도의 인격에 반응하여 역사하시기 때문. 성도의 인격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 좋은 인격이 되면 그만큼 많이 역사하시고, 성도가 성령님 역사하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상태이면 역사하지 않으시니까. 합당한 상태란 곧 말씀 사모와 순종. 말씀대로 사는 삶일 것이다.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 = 말씀에 쓰인대로 사는 것

큰일났네... 나 수양회 때 거짓말했는데.ㅠ 방 사람들에게 금식 고등학생 때 이후 처음이라고 거짓말했다. 또 토요일까지인 거 말 안 했다. 금요일까지인 척 했어. 그러면서 제공되는 음식들 속이 안 좋다니 안 좋아한다니 거짓말 해대며 혼자 안 먹었.ㅠ 아아 그래놓고 네버 블로그에는 왜 썼는가 그래.ㅠ 확실하다. 나 이거 회개해야 해. 아까 낮에 방 사람들이 내 블로그 발견했. 다들 난리났는데. 작가라니. 블로그에 일기 좀 썼기로서니.ㅠ 다들 칭찬해주었지만 내가 거짓말한 거 다 들통났다.

나는 왜 거짓말을 했는가.

스트레스가 되어서. 8월 초 제천 갔을 때 소 목사님을 뵈었는데, 거기서 칼 세미나 집을 공개해 주었던 최 권사님 순원분을 만났다. 난 그분께 금식 이야기 한 적 없는데, 그 분이 반가워하면서 내가 금식한다는 이야기 들었다고 말해서 민망했다. 난... 금식이 일주일로 고정되면서 어떻게 해도 화요일 아침 식사를 피해갈 수 없겠어서... 권사님들 자꾸 의심하시기도 하고 자꾸 부르셔서 밥 먹이려고 하시기도 하고... 그래서 말씀드린 거였는데, 순원분께 말씀하시리라곤 미처 생각 못했거든. 어디까지 말씀하신 걸까. 이번 수양회만 말씀하신 것이면 좋겠는데 부디.

사가에서도 그렇고 자꾸... 십일조 금식을 눈치채는 분들이 늘어가는 것 같아서. 표 안 내려고 애는 쓰는데, 금식이 진행되면 될수록 사가에서는 '오늘 유달리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고 하실 정도라서. 그런데도 장로님이나 집사님들 형제분들인데도 희한하게 눈치가 빠르셔서는. 자꾸 '혹시 금식 중이야?'라고 자꾸 물어 보시니까.ㅠ 그래서 스트레스가 좀 된다.

처음엔 수양회 방 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어서, 다들 금식 처음이라고들 무서워하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금식해봤다, 실은 오늘이 사흘째다, 등등 떠벌리게 되면 회칠한 바리새인이 될까 봐... 는 물론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고 싶으신 복을 내가 여기서 떠벌려서 내 공으로 미리 다 받아 써버릴까 봐. 하나님은 나와 둘이 비밀스레 꽁냥꽁냥하는 것도 몹시 좋아하시니까. 나도 좋고. 암튼 그래서... 한 번 말하면 다들 또 말이 많을 것 같고 나는 계속 말해야 할 거고 그러다 보면 십일조 금식까지 말하게 되어 버릴까 봐 거짓말을 했더니... 나 혼자 내내 늘 활기찬 것을 다들 신기해하면서 자꾸 물어보아서 사소하게 시작한 거짓말이 자꾸 커졌다. 속이 안 좋다니 죽을 안 좋아한다니 입맛에 안 맞다니 등등 하면서 말이다. 집에 와서 찔리긴 했는데... 금식하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더 싫어서 별 생각없이 넘겼다가 오늘 기어이 발각된 것. 네버 블로그에 쓰지 말았을 걸. 진작 수정했을 걸. 바보.ㅠㅠ 바보가 아니라... 집에 가서 회개기도 해야겠다.

*

이럴 때면 모르겠다.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기독교인에게 있어 '금식 기도'는 상당히 자극적인 기도의 종류인지라, 다들 그 단어 앞에서는 잠시 모든 것이 멈추는 느낌이거든. '금식 기도'라는 단어를 접하는 성도들의 눈에서는 수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것을 본다. 두려움, 부러움, 아쉬움, 죄책감, 의심, 그리고 질투. 이 모든 감정들을 한 번에 소환하는 '금식 기도'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굳이 그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고 싶지 않다. 그런 표정들을 보는 것이 피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에 대해 말하다 자칫 내가 교만의 극악죄를 범하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렵기도 하고.

주님은 서서 따로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기도한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두고 의롭지 않다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은밀히 하나님 앞에서만 드리는 기도를 참 기뻐하신다. 그런데 동시에 주님의 은혜는 나누어야 한다고 한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는 엄청나다. 그렇기에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세 가지 중 하나의 방법'이라 하신 오정현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나의 금식기도를 나누어 주님의 은혜까지 나누는 것이 맞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나의 고민이 한 두세 달 정도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만 은밀하게 뭔가 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기도 하고... 동시에 나는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교만도 큰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밝히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같은 방 식구들 지금쯤 서운하지 않을까. 다들 훈련이 잘 된 분들이라 좋은 말만 해주고 있긴 한데, 배신감 느꼈겠지는. 아...ㅠㅠ 지금 생각으로는 네버에 그거 쓰지 말았을 걸 싶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안다. 왜냐하면 이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어느 상황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금식 기도와 거짓말의 상관 관계. 이거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ㅠ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소 목사님께 여쭤 보면 대답해 주실까.


'말씀대로 살다'에서 여기까지 이야기가. 근데 고민인 거라. 나 고민이 돼.ㅠㅠ 아직 믿음도 약하고 섬김도 약하고 훈련도 안 되어 있는데, 주께서 주신 은사가 '기도'이다 보니 사람들이 자꾸 복잡하게 반응을 한다. 그것이 피곤해 난...

*

설교는 단순했는데 내용이... 어쩜 이런가 싶도록 엄청나다. 

'성령사역'은 최근 오정현 목사님께서 집중하시는 주제인 것 같다. 나 또한 그렇고. 에이, 내가 딱히 '사역'이랄 건 없고. 그저 성령님의 전적 통치를 매일같이 사모하고 있으니 만큼 관심이 많이 쏠린다. 더군다나 '치유/신유'는...

모르겠다.

*

유산한 여성도님을 향한 성령님의 명령에 깜짝 놀랐다.;; 바로 얼마 전 내가 '6.3 아침과 같은 음성은 되도록 주시지 말아 주세요'라 했거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거라 생각했다. 뭐... 내게는 그저 '가서 축복기도를 하라'는 마음이었던 거지만. 정말로 주님의 뜻이 맞는 걸까? 요즘은 기도할 때 방해가 너무 심해서... 영적 분별력을 위해 더 기도해야겠다. 말씀을 열심히 보아야.

 

 

 

 

 

→ ◇ ☞ † ⇒ ☆ § ① ② ③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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