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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왕기상 13:15~24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Sermon

by Vano 2023. 8. 21. 20:19

본문

https://www.sarang.org/tv/sermon.asp?sflag=chocung&db_idx=22460

[열왕기상 13:15~24]

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So the prophet said to him, 'Come home with me and eat.'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The man of God said, 'I cannot turn back and go with you, nor can I eat bread or drink water with you in this place.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I have been told by the word of the LORD : 'You must not eat bread or drink water there or return by the way you came.' "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The old prophet answered, "I too am a prophet, as you are. And an angel said to me by the word of the LORD : 'Bring him back with you to your house so that he may eat bread and drink water.' " (But he was lying to him.)

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So the man of God returned with him and ate and drank in his house.

20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While they were sitting at the table,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the old prophet who had brought him back.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He cried out to the man of God who had come from Judah, "This is what the LORD says: 'You have defied the word of the LORD and have not kept the command the LORD your God gave you.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You came back and ate bread and drank water in the place where he told you not to eat or drink. Therefore your body will not be buried in the tomb of your fathers.' "

23 그리고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When the man of God had finished eating and drinking, the prophet who had brought him back saddled his donkey for him.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As he went on his way, a lion met him on the road and killed him, and his body was thrown down on the road, with both the donkey and the lion standing beside it.


김지찬 목사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 주후 2023.08.20 주일예배

*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기독교 후기 시대에 들어선 우리나라

* 기독교 후기 시대 = 기독교가 한 나라의 제도나 사회 경제 등 국민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가 위헤 군림하거나 최소한 국가와 긴밀한 밀월 관계 유지하던 기독교 시대가 끝났다. 사회 전 분야가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떠났고 오직 시장 원리로 움직인다.

* 한국 사회는 원래 세속국가 + 기독교 다수였던 적 없었지만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국가와 밀월 관계 유지하며 큰 영향력 유지했기에 유사 기독교 시대라 보는 학자도 있다. 4/13 명의 대통령이 개신교 출신.

* 기독교 후기 시대 되는 데 유럽은 1400년, 미국은 200년이 걸렸는데 한국은 채 100년도 걸리지 않았다.

 

◇ 기독교 후기 시대 특징 

① 사회 중심에 있었던 교회와 교회 스토리가 주변으로 밀려난다.

 사회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소수임을 느끼며 더 이상 편안함을 누리지 못한다.

기독교는 여러 세계관 중 하나이며 웬만해선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증거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 후기 시대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대처 방안 

① 사회를 통제하려 하지 말고 복음의 증인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라.

종교적 경쟁구도 속에 현상유지 보다는 적극적인 선교적 삶을 살라.

③ 제도적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교회는 강력한 생명운동과 구원운동을 벌여야 한다.

Post-Christendom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명과 구원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진리의 증인으로서 적극적인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

 

◇ 어떻게 해야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기독교 진리에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한 사람이 무엇에 목숨을 거는가를 알아야 그 사람이 믿는 진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진리에 목숨을 걸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기독교 진리란 무엇인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장차 심판주로 오셔서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불신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을 선포하시는 것.

 

어느 정도까지 목숨 걸고 이 진리에 순종해야 사람들이 알아 줄까?

→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 유일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정도의 순종.

현대 교회는 절대적 순종의 모습이 약해지고 있다.

현대 교회의 크나 큰 비극은 믿음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많은데 순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적다는 점이다.
- 짐 월리스 Jim Wallis 목사님(미국 복음주의 리더)

 

 왕상 13장 본문의 배경:

 솔로몬 이후 르호보암이 왕 된 후 왕국이 분열.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 다수렸는데 인구가 남쪽으로 쏠리는 것을 걱정하여 대책을 몇 개 세웠다.

예루살렘 순례를 막기 위해 북방 이스라엘의 남방 경계선 지점인 벧엘에 사당(신전)을 세웠다.

- 벧엘은 야곱의 단이 있는 예루살렘에 맞먹도록 중요한 영적 장소.

레위 자손이 주로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있으니 레위인 대신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삼았다.

7월 15일이던 장막절을 8월 15일로 바꾸었다.

이런 파격적 조치 후에 여로보암이 단 옆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열왕기상 13:1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람 = 선지자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어떤 언급도 정보도 없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외모, 성격, 출신, 배경 등 그 어떤 정보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중요할 뿐이다.

☞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움직이는 사람

이 '하나님의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

=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움직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말씀으로 인해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열왕기상 13: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저주와 심판의 메세지

300년 후에 있을 일을 예언한 것

이 사람을 잡으라 손을 내밀었는데 여로보암 팔에 마비 증세 나타남 =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남

열왕기상 13: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왕의 손을 마비시키는 권능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맡은 우리 성도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여로보암이 태도를 바꾸어 

열왕기상 13: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왕의 잔치와 예물을 거절한다.

열왕기상 13:8 - 10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 하나님은 왜 피곤했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떡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는가?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300년 후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 먼 훗날의 일에 대한 신빙성을 나타낼 것인가?

그 메세지의 신빙성은 그 메세지를 전하는 사람의 신빙성에 달려 있다.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 사소해 보이는 그 음식금지규정을 지금 여기서 순종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전도서 5:18-19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 [히] מַתַּ֥ת 마타트: 하나님의 사람이 수고한 후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최소한의 먹고 마시는 선물조차 허락되지 않은 것.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보인 절대 순종 = 하나님 사람의 신실함 = 그가 전한 미래의 메세지를 믿게 된다.

 

우리가 맡은 진리의 말씀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런데 이 미래의 심판 말씀을 맡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며 세상 일에 힘쓰고 이 땅의 돈을 쌓는 것에 목숨을 건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며 우리가 전하는 진리를 믿겠는가?

 

◇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초대하자 하나님의 사람의 반응 

열왕기상 13:16-17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여로보암 왕을 거절한 것과 거의 같은 말로 거절한다.

열왕기상 13: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우리를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사람이 선배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다.

천사 운운하며 거짓을 말함.

열왕기상 13: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왜 속임을 당해 넘어갔는지 성경기자는 적지 않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의 동기가 선하든 아니든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느냐 아니냐 뿐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왜 거짓말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는지 알 수 없다.

신앙을 다소 잃었는지도. 자신이 사는 벧엘에 대한 하나님 사람의 저주가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어긴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속인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심.

열왕기상 13:20-22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 심판의 말씀은 즉시 실행됨.

열왕기상 13: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한 번의 실수, 그것도 순종하려 했던 실수인데 어떻게 이런 비극을 당해야 했을까.

 

◇ 하나님께서는 왜 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셨어야 했을까?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은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을 위태롭게 했기 때문.

 음식규제규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먼 훗날 있을 심판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이 위태롭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입증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이 오히려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을 증거했다.

열왕기상 13:31-32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빙성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 사람이 불순종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죽음이 다른 사람을 회개하게 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우리의 순종과 불순종을 넘어 하나님꼐서는 끝내 당신의 말씀을 승리로 이끄신다.

열왕기상 13:26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불순종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다.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로보암 왕은 이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열왕기상 13:33-34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열왕기하 23:16-19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라 이르되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의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던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성취 됨

 

◇ 우리는 어떻게 절대적 순종을 할 수 있는가? 

주기철 목사님의 예)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감옥 가기 전에 거부하셨다가 사모님의 설득으로 결사각오로 절대순종 하심

 주님과 교회를 향한 사랑 +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절함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이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면 십자가가 인간을 지고 간다. 그래서 갈보리 산상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 주기철 목사님

우리가 결단한다면 주님께서 가능하게 하신다. 세상이 이런 우리의 희생을 보고 주님을 볼 수 있게 된다.




* 굉장하다... 1부 예배를 드리고 2부 예배중보 하고 피곤해서 3부는 집에 가서 좀 먹으며 쉬었고, 4부를 드렸다. 1, 2, 3, 4부 모두를 직접 나와 설교하신 것도 대단하신데, 설교 들으면서도 놀랐고 이렇게 정리하니 또 놀랍다.

* 이 설교는 마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극히 자상한 선물과도 같다. 예전 VPRS 중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부분이 좀 있는데, 그 중 가장 궁금했던 부분 중 하나였거든.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 처벌이 이해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명쾌하게도.

놀랍다. 신비롭다. 시원하다. 납득되었다. 멋지다. 근사해. 이렇구나. 신학대학원의 수업은 이런가 보구나. 굉장해!

*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을 위해. 그리고 그 사이 생략된 수많은 문장들. 그 문장들이 생략되어야 했던 이유까지 설명이 되다니.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오직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느냐 아니냐인 것. 이유나 사정이나 변명은 중요하지 않아(하나님 ENTJ설 - "결과만 말해").

시간과 공간이 제약을 받는 육체에 거하는 인간으로서는 300년 이후의 일을 확신할 도리가 없다. 현대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도 힘든 일을, 그 옛날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니 오직 그 말씀을 전하는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 말씀의 보증서가 된다는 사실. 그가 얼마나 그 말씀에 목숨을 거는가, 그것에 달려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최첨단 과학 발전이 난무하는 21세기, '기독교 후기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이 또한 놀라운 연결이다. 참으로 멋지다. 제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미래에 이루어질 진리의 진리됨을 증명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그 진리를 맡은 '사람'이다. 자신이 믿는 진리를 얼마나 절실하게 따라 사는가, 얼마나 절대 복종을 하는가가 그가 맡은 진리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다.

기독교의 절대성이 중심에서 밀려난 Post-Christendom시대, 아니, 애초 모든 절대성의 붕괴를 목적으로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네오 막시즘이 세상의 사고와 문화를 장악한 21세기를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를 이렇게 명쾌하게 제시해 주시다니. 충격 받았다.

모더니즘 시대가 있었고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있다. 문화 막시즘이 있고 그것은 지금의 시대정신을 장악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오정현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진리는 시대정신 따위 근접할 수도 없는 절대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무시간대에 거하시는 무한의 하나님께 있어, 짧은 인류의 시간 중 더 짧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시대정신의 얄팍한 유한은 가치 없다. 무한의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성에 기초하며 오직 영원성으로 이어진다. 변함 없는 것. 변하지 않는 것. 하나님은 인간의 인간성 그 자체에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넣으셨다. 그리고 그 영원한 진리는 인간성으로 증명되게 하셨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이 곧 내가 믿는 것의 절대성을 증명한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복종하며 지키는 것으로 내가 믿는 하나님 말씀의 신빙성을 증명한다.

이런 인간의 인간됨이 바뀌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이, 뭐??

절대는 절대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타락한 시대 앞에 아파야 하며 울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마치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의 장신구인 양 세상 사람과 다름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일신의 안녕과 번영만 기복하는 것으로 우리가 어떻게 타종교인들로부터 구별된단 말인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구별된 분이시므로 우리 또한 구별되기 원하신 하나님. 이러니 이 땅의 기독교가 힘을 잃은 것이다. 부처에게 돌신상에게 기복하듯 예수님께 기복한다면, 그렇게 드리는 주일 예배가 어찌 다른 종교와 다른 예배가 된단 말인가.

 *

 나에게 하는 말이다. 실은 고민이 있었다. 선물님은 ㅡ 너무나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ㅡ 자리를 비우셨고, 나는 '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어쩌면 당분간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기회라 생각했다. 가고 싶었다. 온통 하나님 나라 만을 구하는 예배. 하나님의 영광 만을 구하는 예배. 뜨거운 예배. 그 예배를 다녀오면 한동안 마음이 뜨거워져 있기 때문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가지 못했다. 갈수는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 그 예배의 힘을 받고 싶었지만... 나는 왜 가지 않았나. 

그저께 기도 중에 문득 생각난 일이 있었기도 하고. 모르겠다. 방언 기도가 한참 진행되던 중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한 사람이 뜬금없이 생각나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하게 된 건데, 그 사람이 4부를 드리거든. 그렇다고 예배 때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이 설교도 자꾸 뭔가 간지럽게 맴돌기도 하고... 또, 선물님 안 계신 동안 자리를 지켜야 할 것도 같고. 암튼 한 달 전 기도드렸던 것과 다르게 4부를 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앉았고. 은혜 받았고. 사람들은 울었고. 4월 이후... 는 최근에는 청계산 산상기도회에서 또 다시 은혜의 늦은 비가 쏟아졌던 거라. 4월 이후 예배마다, 예배 중보 때도, 가는 곳마다 주변의 사람들이 운다. 형제님이고 자매님이고 어린 사람이고 어르신이고 없다. 그냥 운다. 다 운다. 은혜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고 있다. 이제 곧 10.23이 있을 테니 켜켜이 쌓인 은혜는 곧 그 가속도를 더할 예정이다. 가을 특새는 어떻게 되는가? 새생명축제는. 칼세미나에 추수감사절에 성탄절. 대충 그 정도일까 우리 교회 하반기 사역은.

그동안 예배 때마다 답답했었다. 한 쪽에서는 새파란 눈의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꿈꾸며 제각기 일어서 손 들고 눈물 쏟으며 하나님 나라 위해 기도하며 온 힘 다해 예배하는데, 여기저기 자식 취직 기도, 승진 기도, 시험 합격 기도, 사업 번창 기도... 아마도 나는 4개월 간 개인기도중보를 하면서 마음이 많이 다친 것 같다. 정말 많이 다쳤다.

그러면서 예배당에 앉아 온 힘 다해 찬양하고 머리가 핑 돌도록 집중하며 예배하는 나 자신이 외롭다 생각했다. 나 혼자 이상한 것만 같고. 그래도 어쩔 수는 없다. 나는 온 존재 다해 경배 드리기 위해 지으심을 받았으니. 내 창조주를 찬양하기 위한 주일 예배에서 주의 피조물로서 온 힘 다해 예배하지 않을 수 없다ㅡ생각했다. 그러다

최근. 언제쯤이었더라? 아마도... 다른 쪽 예배를 두 번 갔는데 지금까지. 그 두 번째 예배를 드린 후였던 것 같다. 그 다음 주일에 문득 우리 교회 예배에 앉아 있는데... 내가 드리는 예배가 과연 전적인 예배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맞는가? 그것은 '나의 최선'이었던 건 아닐까? '내가 드리고픈 최선의 예배'가 곧 '하나님께서 받고 싶으신 최선의 예배'가 맞는 걸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예배당에 앉아, 마치 나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라는 듯, 다른 사람들의 예배를 탄식하는 내가 드리는 예배를 원하시는 걸까? 그것이 하나님 받으시기에 온전한 예배가 맞을까?

그럴 리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 없지 않나. 그따위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온전할 수 있나. 오히려 자신의 안녕을 구하는 소박한 마음의 진실된 예배에 비해 훨씬 더 위선적이고 교만에 찬 예배인 것이 아닐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갑자기 두려워졌다.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드리는 이 예배가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맞을까. 나는 이 예배에서조차 또 가장 극악한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생각이 최고점을 찍은 것은 지난 주 오정현 목사님의 설교에서였다. 어디였더라... 어느 부분이었더라...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눈물을 쏟은 기도... 눈물의 기도. 내가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던 바로 그 부분.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은혜의 부분에서 나는 크게 도전을 받았다. 나는 최선을 다한다. 그러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의 최선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최선은 아닐 수 있잖아. 아...ㅠ 정말이지... 모르겠다. 나는 나를 모르겠고, 어떻게 해도 나를 모르겠고. 내가 나를 속이는 것도 죄인데, 내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떠하니 저떠니 같잖은 교만일랑 관두고 나 자신이나 온전히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한다. 기실... 하나님 앞에 단 한 사람이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완벽히 드릴 수 있다면. 그런다면 하나님의 증거가 드러나지 않을까. 그 기쁜 예배를 받으신다면 하나님께서 가만 계실 리 없지 않을까. 아...ㅠ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꼭 흡족한 예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예배를 내가 온전히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예배란 어떤 것일까. 나의 열정, 나의 최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최선 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어떤 생각, 어떤 마음가짐, 어떤 자세와 태도이면 되는 걸까.

 

하나님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더 신비로우셔서는.

다가갈수록 모르겠다.ㅠ

그런데 은혜는 더 쏟아 주시고, 간절히 찾으면 반드시 만나 주시니.

그렇게 만나 주시는 하나님은 더욱 신비로우시고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 참 기이하신.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데. 더 알고 싶은데.ㅠ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ㅠ


설교를 정리하면서 충격이 가장 컸던 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불순종한 순간, 옆의 타락한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이 임했다'였다. 

ㅠㅠ

하나님의 결벽증.

그런 하나님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니 나도 참.ㅠ

나 결벽증 질색하는데. 왜 하나님은 좋지.ㅠ

'절대성'의 매력이 확실히 있다.

하나님의 이 카리스마에 자꾸 난 반해.ㅠ 

무서운데 자꾸 반해.ㅠ

무서운데 자꾸 반하는 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신약의 나는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내게는 예수님의 피가 있으니까. 성령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당신을 아예 다 뜯어 주시기로 결정하셨으니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 절대 희생은 당신의 절대 전능하심을 반증한다. 오직 유일한 전능자이자 유일한 절대 사랑, 절대 공의 만이 가능한 절대 희생. 아 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두서가 없다. 정리가 왜 이래.ㅠㅠ 그만큼 놀라운 설교였다.

*

막 글을 쓰고픈 마음이 꿈틀꿈틀*

이렇게 강렬하게 글을 쓰고 싶어지는 설교라니.

'글을 쓰고 싶다' 하며 생각이 모락모락 실시간으로 피어 오르는 설교라니

놀랍다.

*

마음이 이상하게 쪼개진다. 한 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설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선물님의 설교가 그립고 너무 또 그립고 그런다. 나는 요즘 정말 이상한 것 같아.

 

 

 

→ ◇ ☞ † ⇒ ☆ § ① ② ③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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