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까지 하려고 한 건 아닌데... 하다보니 길어서 따로 포스팅을 팠다.;;
다음은 '의인'에 대한 성경구절을 다 찾아 달라는 나의 요청에 따른 코파일럿의 답이다.

위의 의인 구절을 찾은 이유는
야고보서 5:16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니라.”
베드로전서 3:12 – “주의 눈은 의인들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히브리서 10:38 –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말씀 때문이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하나님은 의인들을 향하시고 들으시기 때문이다. 그 의인은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이다. '믿다'는 아직 눈앞에 없는 것,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히브리서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브리서 11:6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로마서 8:24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로마서 10:17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후서 5:7 –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눈앞에 이미 있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대로 '사실'이다. 눈앞에 사과가 있으면 '사과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 '사과가 있다고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과가 있다고 믿는다'는 눈앞에 사과가 없거나,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때 하는 말이다. 이처럼 믿음은 현상(phenomenon)과 다르다. 그러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는가. 보는 것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취하면 되는 일이다.
핵심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당겨와 현재의 현실로 사는 행위'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6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시는 힘이 크다. 즉 응답의 확률이 높다. 그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믿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성도다. 원칙적으로 성도의 모든 기도는 응답이 되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지. 그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기도 응답률이 높음을 보장받지는 못한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음으로 받는 '칭의'를 넘어서, 기도의 응답을 받는 수준의 '의인'이 있는 것일 텐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기꺼이 응답하시는 '의인'의 특징이 바로 '믿음'과 '하나님과의 동행', '순종' 등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과 '임마누엘', '순종'이다.
창세기 6:9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사실 나는 이 구절에서 좀 놀랐거든. 그렇게 많이 읽은 이 구절이 새삼 들어왔던 거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노아가 의인인 이유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임을 몰랐다.

큰일났네... 묵상이 끝나질 않는다...ㅠㅠ 이렇게까지 하려던 게 전혀 아니었는데.ㅠㅠ;;;;
노아는 의인으로 당대에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다. 노아 당시는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했을 정도로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다. 그 속에서 노아는 홀로 하나님을 믿으며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다. 그러니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구절은 당연하게도 '에녹'으로 번진다. 노아는 어떻게 그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하나님을 믿고 '동행'할 수 있었는가? 아마도 그의 증조할아버지 '에녹' 덕분이 아니었을까? 노아의 선조들은 대단한 이력을 가졌다. 증조할아버지가 무려 '에녹'이다.
위의 도표를 보면 아담이 죽은 해가 창조된 이후 930년이고 에녹이 죽은 해가 987년이다. 에녹은 일 년의 일수인 365세를 살다 죽었는데, 당시 수명이 거의 1천 년에 가까웠음을 생각하면 일찍 죽어도 너무 일찍 죽었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는 더군다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잖아 하나님께서 예뻐하시다 못해 그를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셨, 즉 승천시키셨잖아. 그런 사람을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어야 했을까? 그의 앞에 있는 다섯 명의 선조들이 살아 있는데 그들을 제치고서는 죽은 것도 아닌데도 먼저 하늘로 데려가신 이유가 뭘까?
[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을 살았던 '자연사'가 아닌 '사고'로 아담 이전에 죽은 아벨은 예외로 함.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사람 아담은 범죄를 함으로써 사망을 야기한 사람이다. 즉 하나님께서 생명을 시작하신 사람 본인이 생명의 끝을 들여와 버렸다. 그리하여 결국 아담은 죽었다. 죽음으로써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아담 이후 두 번째로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바로 에녹이다. 비록 그는 아담의 7대손이지만, 그들의 할아버지, 증조, 고조 할아버지들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났다. 차이점은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상태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없을까?
로마서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아담은 하나님의 생기를 직접 받아 생령이 된 유일한 존재다(창 2:7). 다른 모든 인류는 출생으로 생명을 받았지만, 아담만은 하나님의 입김으로 직접 생명을 수령함으로써 인류 생명의 수령자이자 전달자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담이 불순종함으로써 — 생명의 통로가 사망의 통로가 되어 버렸다. 참 그렇지. 생명을 받은 1대가 바로 생명을 스스로 끊어 버리다니. 하나님 마음이 정말 아프셨겠다.ㅠㅠ
다음은, 에녹에 대한 나의 '최초로 창조된 사람 아담은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났고, 그의 다음으로 에녹은 살아 있는 상태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났다 ㅡ 에 묵상을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에녹이 살아있는 상태 그대로 천국의 영생으로 옮겨진 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 의도하셨던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은 사람이 영생하기를 원하셨기에 에덴 한가운데에 생명나무를 두셨으니까요.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같고 또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내내 동행함으로써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셨을 텐데, 하나님의 그 창조 의도를 이룬 한 모형으로써 에녹을 아담 바로 다음 순서로 영원의 품으로 안으신 것은 아닐까요?' 질문에 대한 클로드의 답이다.
이 부분이 오늘 묵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 범죄 전까지는. 에덴에서 하나님과 거닐던 그 아담이(창 3:8의 배경) 불순종으로 그 동행을 스스로 끊었고, 결국 930년 후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에녹은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히브리어 원문에서 "동행하다"는 הִתְהַלֵּךְ (히트할레크) — 재귀·반복형으로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함께 걸었다"는 의미입니다. 일시적 동행이 아니라 삶의 전체 방향과 패턴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동행의 결과가 죽음이 아니라 그대로 옮겨짐이었습니다.
"에녹이 살아있는 상태 그대로 천국의 영생으로 옮겨진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 의도하셨던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것은 매우 깊은 통찰이며,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같은 방향으로 생각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이자 청교도 신학자인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이 순종했다면 죽음을 거치지 않고 영화로운 상태로 옮겨졌을 것이며,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바로 그 원래 의도된 길의 미리 보여주심(Proleptic sign) 이라고요.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 도 Created in God's Image 에서 유사한 입장을 취합니다 — 아담의 최초 상태는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상태였으며, 순종의 끝에는 죽음 없는 영화(glorification)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의 원래 의도 → 하나님과의 동행 → 죽음 없는 영화로운 이행 아담은 그 길을 범죄로 닫았고 에녹은 타락한 세상 한가운데서 그 원래의 길을 걸어 하나님의 창조 의도의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질문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담 바로 다음 순서로 에녹을 영원의 품에 안으신 것은 —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 의미심장합니다.
아담의 죽음이 선언한 것: "인간은 이렇게 끝난다" 에녹의 승천이 선언한 것: "아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의도하셨다"
두 사건이 연달아 놓임으로써, 하나님은 사망이 최종 선언이 아님을 역사 속에 즉시 새겨 넣으셨습니다.
아담이 죽은 지 57년 후, 바로 다음 순서로 에녹을 살아 있는 상태로 데려가심으로써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인류(아담) 너희를 스스로의 생명을 중단했지만, 나(하나님)는 너희 스스로가 끊은 생명을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에녹처럼 나(하나님)와 온전히 동행하기만 한다면."
*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와 버려따. 으앙.ㅠㅠ😭😫😩;;;
*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그 엄청난 '에녹'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죽음을 겪지 않고 살아있는 그대로 천국에 가신 분. 얼마나 유명했겠는가. 아직 사람 수가 그리 엄청 많지도 않았을 사회에서 에녹의 존재는 절대적이지 않았을까? 우리의 최초 시조인 아담도 죽었는데, 그 아담이 죽고 나서 바로 에녹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 사람들은 헷갈리지 않았을까? 분명 첫할아버지 아담이 범죄해서 우리가 에덴에서 쫓겨나고 죽게 되었다 했는데. 그 증거로 마침내 아담이 죽으셨는데. 그런데 그 다음 차례로 이 세상을 떠난 에녹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쩌면 희망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에녹 할아버지처럼 죽지 않고 승천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그 소망을 에녹이 승천한 지 69년 후에 태어난 노아가 꿈꾼 것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에녹의 아들이 무려 므두셀라인데, 그는 이름부터가 '이 므두셀라가 죽을 때 심판이 있으리라'라는 뜻이었으며, 989세로, 심지어 930년을 살았던 최초의 할아버지 아담보다도 더 길게 살았던, 가장 수명이 길었다. 므두셀라의 수명이 1천 년에 가깝도록 길었던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심판을 연기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긍휼의 마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니까.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기를 기다리셨으니까. 지금도 그러하신 것처럼.
암튼, 증조할아버지가 그 대단한 '에녹', 전설의 '에녹'이었고, 할아버지가 그 어마어마한 종말계시적 이름을 지닌 채 끝없는 생명을 사시는 것 같은 '므두셀라'였다. 실제로 므두셀라가 죽고는 대홍수 심판이 일어났으니까. 그 어마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두었던 노아이 아버지 라멕이 가졌던 삶의 무게는 대단했을 것 같다. 언제 므두셀라와 라멕 모두를 묵상해 보고 싶네. 므두셀라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이며 자비였다. 비록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노아의 가족뿐이었음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면 므두셀라는 이름 때문에 살아 있는 내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했을지도 모르겠고... 그가 죽고는 사람들은 비로소 아차! 싶었겠지만, 그를 놀렸던 친구들은 이미 다 죽고 없었겠지...
근데 말이다... '에녹'과 '므두셀라'에 비해 평범한 것 같은 라멕은 또 그렇지도 않은 것이, 그는 아버지 므두셀라보다 살짝 일찍 죽었다. 그런데 그의 수명이 또 777세야... 아... 이 집안은 징차... 평범한 사람이 엄써...;;; 이러니 노아가 당대의 사람들과는 다를 밖에. 자신 위의 3대가 다 특별 중의 특별한 사람들이잖어... 죽음을 겪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맞게 승천한 '에녹'과, 이름 자체에 심판의 예언이 담겨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혼자 계속 생명을 살아가고 있어 도무지 죽지 않을 것 같은 '므두셀라'와, 무려 완전수인 7이 세 개나 있는 777이라는 완전한 수명을 살고 죽은 아빠 '라멕(힘, 겸손이라는 뜻)' 아래에 태어나, '위로'라는 뜻을 지닌 '노아'는 평범하지 않은 3대 선조들을 삶과 죽음, 또는 이동?의 모습과 전통 속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긴 하다. 바로 윗대인 아빠까지 777세에 돌아가셨으니, 노아의 삶에 대한 시각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해 있었을 것 같다ㅡ아 이것은 노아의 가계에 대한 다른 묵상이었는데 여기로 와서 이어지게 되네 참.;;
자자, 여기서 다시 돌아가서...;;; 그러니까 이 묵상이 원래는 '기도 응답'에서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다들 기도 응답이 절실히 필요하시니까 말이다.
기도 응답 → 의인 → 믿음 & 하나님과 동행 [ → 노아 → 에녹 → 아담 ]
이렇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과 동행은 신앙의 본질이자 궁극의 목표인 것이고, 그것을 위한 조건이자 방법이 '믿음'이다.
마가복음 11:24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구절을 보아도 응답의 비결은 '믿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
To be continued someday.
나 방전.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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